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하일 칼라시니코프 (문단 편집) === 총기 개발자의 삶 ===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소련군은 대전 말기 독일군의 신무기 [[StG44]]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와 비슷한 신형 무기를 장차 소련군 주력 개인화기로 삼을 계획을 세웠는데, 마침 서방 국가들도 돌격소총 개발에 들어갔다는 첩보가 들어오자 소련 정부는 빨리 돌격소총을 완성하라고 닥달했다. 툴라 조병창에서는 10명의 설계자의 시제품 중 가장 우수한 3개 후보를 뽑고 이 3개의 총기를 테스트해서 가장 우수한 후보를 정식으로 양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0명의 설계자 중 칼라시니코프만 유일하게 고졸이였고 23세의 어린 나이였다. 그는 후보군에 들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당시 돌격소총 개발의 큰 난제는 총기 걸림의 최소화였다. 그는 탄피가 짧은 [[7.62×39mm]]를 선택했는데, 탄피가 짧으면 약실에서 탄피가 빠져나올때 잘 걸리지 않아 신뢰성이 높아진다. 어찌어찌 최종 3개 후보군에 들긴 했는데, 칼라시니코프는 다른 후보군과 차별화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순하지만 확실하게 발사되는 총을 만들길 원했다. 경쟁상대 중 하나였던 [[토카레프]]는 시간 날 때마다 말버릇처럼 구동부에 모기 주둥아리라도 들어가면 안 된다고 고함을 치면서 정밀함을 중시했다. 하지만 칼라시니코프는 반대로 생각했다. 가능하면 구동부에 여유를 두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가스 실린더와 피스톤, 볼트와 공이 틈새를 무려 '''0.3 mm'''로 설정했는데, 총기 같이 정밀한 부품에서 이 정도 틈과 오차는 그 당시에도 충격적인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런 큰 틈새는 AK-47 신뢰성에 한몫했다. 춥거나 더울 때 철로 만든 부품들이 팽창, 수축하면서 총기 고장을 일으키지만 AK 시리즈는 이러한 여유 때문에 그런 걱정이 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사들이 쉽게 분해할 수 있고 고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움직이거나 분해되는 부품을 8개로 줄였다. 또한 야전에서 분해할 때 나사도 필요 없이 탄피로 분해가 되게 설계했는데 이 부분은 독일제 총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또한 약실에 이물질이 들어가도 노리쇠가 이를 밀어낼 수 있도록 노리쇠를 무겁게 했다.[* 약 500g 정도로 M16에 비해 2배나 무겁다. 때문에 발사속도도 돌격소총 중 느린 축에 속한다.] 덕분에 [[저반동포|주퇴 반복이 길어서 적당한 발사속도]]를 가지며,[* 원리 자체는 저반동포와 같지만 저반동포와 달리 반동은 줄여주지 못했다. 총기가 너무 무거워져서 다른 부분을 가볍게 했기 때문이다.] 탄피가 빠져나가는 동안 약실을 충분히 식힐 시간을 주었고, 이물질이 좀 들어가도 노리쇠가 이를 밀어서 총 밖으로 보내 버릴 수 있었다. 이렇게 완성된 AK-47 [[프로토타입]]은 1946년도에 출시된 설계안 3개들 중 하나로 뽑혔으며, 연사 테스트에서 다른 설계자들의 2개의 후보 총기가 모두 탄이 걸리거나 폭발하는 등 결함을 보인 반면 칼라시니코프가 설계한 소총이 유일하게 테스트를 통과해 가장 우수한 평가를 받아 소련군 제식소총으로 1947년 채택되어 [[AK-47]]이라고 명명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Hy5jNVIgaUo)]}}} || || 테스트 당시를 재현한 영화 '칼라시니코프'[* 한국에서는 'AK-47'로 소개되어 영화의 내용을 감안했을 때 다소 잘못된 제목이 되었다.]의 모습[* 다만 실제로는 저렇게 조용한 분위기가 아니였다고 한다. 칼라시니코프 휘하의 엔지니어는 AK-47이 흙먼지를 뒤집어쓰고도 정상적으로 발사되는 모습을 보고 "마치 개가 물기를 터는 것마냥 발사되는군!" 하며 환호했다고 한다.] || 그는 이 소식을 1948년 1월에 들었는데 아들을 대학 보낸 것 처럼 기뻤다고 한다. 그의 나이 28세 때 일이였다. 이 공로로 그는 1949년 스탈린 훈장을 수여받고, 1951년에 육군 상사로 군을 전역한 후에도 이젭스크 조병창의 주임 설계관으로 일하면서 AK-47의 개량형 소총 [[AKM]], AKM을 베이스로 한 [[칼라시니코프 경기관총|RPK]] 분대지원화기, [[칼라시니코프 기관총|PK]] 다목적 기관총 등 소련군의 주력 총기들을 설계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bonja_ka.jpg|width=100%]]}}} || || [[AK-47]] [[프로토타입]]을 들고 있는 미하일 칼라시니코프 || 이러한 공적으로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 2회, [[레닌훈장]]을 수훈했다. 1969년에는 육군 대령 계급이 수여되었다. 1971년에는 비록 대학을 다니지는 못했으나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공학박사 학위가 수여되었다.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 체제가 수립된 후에도 [[이젭스크]] 조병창이 민영화된 [[이즈마쉬]]사의 주임 설계관으로 재직하였다.[* 이후 2013년 8월 14일, 대주주의 요구로 칼라시니코프의 업적을 기려 회사명을 [[칼라시니코프]]로 바꾸었다.] 1994년, 75세 생일 축하 선물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종신 육군 기술[* 보통 장성 계급은 병과가 없어진다. 그의 이력을 생각해서 기행병과로 남겨 놓은 것으로 보인다.] 중장계급을 수여받았다. ~~사실 그의 공적으로 따지면 원수 계급도 모자랄 듯~~ [[러시아군]]의 정년은 60세이므로, 칼라시니코프는 사실상 '''최고령 러시아군 장군'''인 셈이다. 2009년 11월 10일 러시아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칼라시니코프에게 러시아 영웅 칭호를 수여했다. 그의 아들도 그의 뒤를 이어 총기 설계에 종사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칼라시니코프의 아들인 빅토르 칼라시니코프는 1993~1995년에 알렉세이 드라구노프[* '''[[드라구노프 저격소총]] 설계사인 예브게니 드라구노프의 아들이다.''']와 같이 [[PP-19|PP-19 비존]] 기관단총을 개발해냈다. 그리고 이 기관단총은 러시아군 내에서 잘 쓰이게 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AK-47 개발 이후 30살에 [[이젭스크]]로 이사 와서 평생 살았는데, 1977년 아내 [[예카테리나]]와 사별한 후 1975년에 지어진 아파트에서 손자 이고르 칼라시니코프와 함께 살았다. 30평 가량의 이 아파트는 처음 지어질 때에는 당 간부들이 살았던 고급 아파트였으나[* 당대의 소련 일반인 살던 아파트가 평균적으로 18평에 방 3개 정도였다. 사실 당대에도 영국, 프랑스, 스웨덴, 네덜란드 등 많은 선진국에서도 근교 지역에 대량으로 아파트를 건설했기 때문에 서민이나 중산층들이 소련처럼 아파트에 사는 경우는 흔해빠졌지만, 당대 미국 중산층들이 도심 근교에서 넓찍한 전원주택에 사는 것과 비교되면서 많이 까였다. 사실 미국에서 중산층들이 뉴욕과 디트로이트 등의 치안이 악화되어 도심지에서 사는 걸 꺼리는 현상까지 벌어졌을 때라 상대적으로 소련인들이 불쌍해보였기는 했을 것이다.]2000년대 기준으로는 낡아서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90살 나이임에도 계단을 오르내리며, 출퇴근을 했다. 대신 회사에서 고용한 [[메이드]]가 하루에 한 번씩 방문해 청소해 줘서 집안은 남자 2명이 사는 집치고는 항상 깨끗하게 유지되었다고 한다. [[AR-15]]를 개발해 그 로열티만으로 재벌이 된 미국의 [[유진 스토너]]와 달리[* 모든 발명품의 특허권은 발명 당사자의 것이며 따라서 당연히 아말라이트가 콜트에게 넘긴 권리들은 오직 아말라이트 자신이 보유한 권리들뿐이었다. 유진 스토너가 보유한 권리들은 고스란히 본인에게 남아 있었다.] 갑부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때 알려졌던 것처럼 딱히 가난하게 살았던 것은 아니었고, 소련 기준으로는 꽤 잘 살았다. 소련 시절에 이미 공장 노동자의 4배나 되는 월급을 받았으며[* 당시 소련 서기장의 월급은 공장 노동자의 7배에 불과했다.] 배급에서 우선순위에 놓여져 있었고 정든 아파트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으며 여름에는 [[별장#다차(구 소련의 별장)]]으로 놀러갈 정도였다. 월급은 본봉 400달러에 기타 수당들이 붙으면 800달러 정도인데 사실 당시 소련의 평균적인 급여수준이 200루블인 점을 감안하면 꽤 풍족하게 살았고, 일반노동자들이 낮은 임금에도 수중에 돈이 많이 남아돌았던 시절인 만큼(...) 칼라시니코프도 금전적으로 크게 부족한 없이 살았다. 또한 소련 붕괴 후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AK-47(보드카)]]나 자신의 이름을 딴 [[손목시계]][[https://www.amazon.com/gp/product/B006JF8B1A?tag=amzpanda-20|#]] 등으로 꽤 큰 수익을 올리기는 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아파트에서 손자들을 불러서 냉동식품을 데워 먹거나 자신이 직접 사냥한 사슴뼈로 우려낸 [[사골국]] [[콩소메]]에 편의점에서 사온 [[펠메니]], [[피로시키]] 등을 넣어 만든 [[만두국]]을 저녁으로 먹으며 [[올리가르히]] 같은 부유층에 비하면 평범하고 소탈하게 살았다. 일본 기자와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은 늙었기 때문에 이 정도면 족하다고 밝혔다. 아무래도 성격 자체가 물욕은 크게 없어서 몸만 편하면 그 정도 생활 수준에 만족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예우를 받고 살았기는 했어도, 부유층급으로 산 것은 아니다. 금전적으로 부족함이 없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선진국의 여유로운 중산층 정도의 수준이었고, 넉넉하게 산 것도 소련의 물가가 싸고 복지혜택을 잘 받아서이지, 당대에도 선진국의 평균 급여로 치면 고위급 인사가 받는 급여치고는 초라해 보이기는 했다. 실제로 소련 말기 개방 정책에 따라 [[스미소니언 재단]]과 버지니아 총기수집협회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칼라시니코프는 자신의 월급으로는 미국산 구두 하나 못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좌절했다.[* 결국 구두와 정장을 그의 미국인 친구들이 대신 사 줬다고 한다.] 돈이 넘치는 부유층이 된 것은 소련이 망하고 자본주의 러시아 연방이 들어서고 나서 자체적으로 회사를 차려서 그런 것이다. 대신 공로도 제대로 인정받아 많은 훈장을 수여받았다. 1990년에 미국을 방문해[* [[백악관]]도 방문했는데, 그는 미국 대통령이 고작 이 정도 규모의 건물에서 집무를 보냐고 믿지 못했다고 한다.] 유진 스토너와 만난 뒤에 한 인터뷰에서, 자기는 개인용 비행기나 헬기는 없고 AK 소총으로는 한푼도 못 벌었지만 훈장은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스토너가 자신이 받은 훈장들을 부러운 듯이 봤다고 말했다. 유진 스토너는 생애 많은 돈을 벌어서 매우 부유하게 살았지만 훈장과 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상을 수여받은 적은 없었다. 또한 발명한 총기의 사회적인 인식을 비교하자면 AK 시리즈와 PK, RPK 기관총은 소련군에 제식으로 채용되는 과정에서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스토너의 AR-10은 이중구조를 적용한 총신이 터저서 입찰에서 떨어지고 그 때문에 AR-15의 채용도 공군 비행기지 방어 병력용 화기 납품 같은 틈새시장을 고려해야 했다. 적어도 사회적 명망이나 명예에 있어서는 칼라시니코프가 유진 스토너를 부러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평생 살았던 [[이젭스크]]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서 그가 지나가면 항상 반갑게 인사하고 함께 기념 사진을 찍어주길 부탁했는데, 그때마다 귀찮은 기색 없이 항상 사진을 찍어줬다고 한다. 더욱이 칼라시니코프 소총은 [[T-55]]와 마찬가지로 소련의 위상국들을 빠르게 무장시키는 데 손색없는 설계였기 때문에 로열티 하나 안 받고 뿌리다시피 했다. 물론 생산성과 가성비가 좋다보니 안 팔릴 리는 없었겠지만, 사실 지금 시중에 돌아다니는 AK의 다수는 라이센스를 무료로 받은 중국산 [[56식 자동소총]]이다. 결국 라이센스를 제대로 내는 나라는 베네수엘라밖에 없었기 때문에 칼라시니코프 생산업체는 한때 파산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파일:external/a1.l3-images.myspacecdn.com/l.jpg|width=550]] 1990년 [[유진 스토너]]와 첫 만남에서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시험 사격장에서 서로의 총기를 쏴보고, 칼라시니코프는 즉석에서 AK-47을 분해해서 스토너에게 설명해주기도 했다. 두 거장의 만남은 유튜브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https://youtu.be/bPvNV3tBz1s]] 스토너는 베트남전 당시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AK-47 VS M16]]은 AK가 이겼다고 인정 했고 칼라시니코프는 M16은 AK-47보다 아름답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평소에 '''자신이 존경하던 유진 스토너'''가 자기를 인정해줬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다고 회상했다.[* 松本 仁一 <<カラシニコフ>> 2004] 이처럼 소련-러시아 출신 총기 설계자답지 않게 유럽 계열 총기보다 미국 계열 총기에 영향을 크게 받았던 인물이다. 첫 총기였던 [[존 브라우닝]]의 총기를 수없이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그의 총기 설계의 특징인 '단순함'과 '완결성'을 모토로 삼았다. 본격적으로 총기 설계를 배우던 시절에 참고했던 총기들도 당시 [[무기대여법]]으로 들어온 미국 총기들이였던 점도 한 몫했다. 실제 그의 AK-47은 [[레밍턴 모델 8]]과 상당히 닮았고,[[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gun&no=124370|#]] 작동 구조인 [[가스 작동식]]은 [[M1 개런드]]와 같은 롱 스트로크 가스 피스톤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1997년에는 유진 스토너가 사망하기 직전 러시아로 와서 칼라시니코프와 다시 만났는데, 이 때 서로가 개발한 소총을 들어보는 모습이 나왔다. 사진에서 스토너는 [[AKM]]을 들고 있고, [[칼라시니코프]]는 [[M16A2]]를 들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